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츠 모리츠 폰 레이시 (문단 편집) === 7년 전쟁 === 1756년 7년 전쟁이 발발하자 브라운 원수의 부대에 합세한 그는 10월 [[로보지츠 전투]]에서 부상당했으나 끝까지 전의를 잃지 않고 적과 용감히 맞서 싸운 공로를 인정받아 소장으로 진급했다. 1757년 5월 6일, 레이시는 [[프라하 전투]]에 참가했으나 또다시 부상을 입었고 11월 22일 [[브레슬라우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의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해 12월 5일 [[로이텐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주력군이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농락당해 참담한 대패를 당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1758년, 레이시는 모든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의 최측근이 되었다. 이후 그는 다운 백작과 함께 남은 전쟁 동안 프리드리히 대왕에 맞서 싸웠다. 그해 2월에는 총참모부가 설립되었고 레이시는 다운 백작에 의해 총참모장이 되었다. 그는 프로이센군과 정면전을 벌이기보다는 장기전으로 끌고 가서 적을 지치게 만드는 전략을 채택했다. 이 때문에 그해 봄 모라비아를 침공하여 모라비아의 수도 올로모우츠를 포위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군과 회전을 벌이길 희망했으나 적이 응해주지 않자 초조해 하다가, 오스트리아군이 보급로를 교란하는 데다 대규모 수송 부대 마저 [[돔슈테트 전투]]에서 와해되자 7월에 본국으로 철수했다. 그리고 1758년 10월 14일, 레이시는 총참모장으로서 [[호크키르히 전투]]에 참가해 방심한 프로이센군에 대한 오스트리아군의 기습 공격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냈다. 그는 이 공로로 그해 12월 [[마리아 테레지아]] 대십자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스프레처 보병대의 지휘관으로 발탁되었다. 1759년 9월 1일, 레이시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발표한 새로운 보병 및 기병에 관한 규정을 고안했고 11월 20일 [[막센 전투]]에서 프로이센군 14,000명을 포위해 항복시켰다. 그는 이 공적으로 보병대 대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후의 베를린을 향한 공세는 성공적이지 못했고, 8월 15일 [[리그니츠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의 프로이센군에게 기습당해 고전하고 있던 라우돈 남작 [[에른스트 기데온]]을 구하러 가던 다운 백작에게 이미 늦었으니 철수할 것을 건의해 다운 백작이 전장 근처까지 이르렀다가 철수하게 만듬으로서 세간의 비판을 받았다. 특히 라우돈 남작은 자신이 리그니츠에서 수많은 병력을 희생시켜가며 적과 맞서 싸웠거늘 8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끌고 전장에 도착했으면서 도와주지도 않고 철수해버린 것에 격분해 다운 백작과 레이시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이후 다운 백작은 레이시의 최고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을 의심했고 11월 3일 [[토르가우 전투]]에서 부상당했을 때 레이시에게 임시 지휘관을 맡기는 걸 거부하고 [[아돌프 니콜라스 폰 부커우]] 장군이 자신을 대신하게 했다. 이후 레이시는 여전히 다운 백작과 함께 했지만 이렇다할 전공을 세우지 못했고 라우돈 남작과의 심각한 갈등에 시달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